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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성공한 사례 실패 사례(feat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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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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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사례
1.이승만(임시정부)

이승만은 외교를 구실로 하여 직무지를 마음대로 떠나 있은 지 5년에, 바다 멀리 한쪽에 혼자 떨어져 있으면서, 난국수습과 대업의 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허황된 사실을 마음대로 지어내어 퍼뜨려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고 민심을 분산시킴은 물론이거니와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 수입을 방해하였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公決)을 부인하였으며 심지어 정부까지 부인한바 사실이라. 생각건대, 정무를 총람하는 국가 총책임자로서 정부의 행정과 재무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하야 의정원의 선거를 받아 취임한 임시대통령이 자기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 하야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심지어 한성조직의 계통 운운함과 같음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라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 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의 진행을 기하기 불능하고 국법의 신성을 보존키 어려울뿐더러 순국 제현을 바라보지 못할 바이오 살아있는 충용의 소망이 아니라. 고로 주문과 같이 심판함.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제42호)

대한민국임시헌법에 따라 상해의 임시의정원 심판위원회가 밝힌 이승만 대통령 탄핵 사유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승만 대통령 탄핵은 대한민국 7년 3월 11일에 이뤄졌다. 1925년 3월 11일의 일이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18일 이승만을 탄핵하고, 23일 면직시켰다. 그리고 23일 곧바로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따라서 사실상 대한민국 역사의 첫 탄핵대통령은 이승만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대한민국헌법 전문에도 나와 있다.

역사적 배경

이승만 대통령이 탄핵을 당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9월 상해에서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가 통합해 출범했다. 이때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넘어도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 오지 않았다.

이에 임시정부의 소장파들은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였는데, 이에 대해 안창호가 반대하여 불신임안은 일단 없던 일이 됐다. 그러나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임시정부는 북경파(신채호 등)의 비판을 받게 됐다.

이는 1919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한국은 당장 독립될 가망이 없고 또 독립된다고 하더라도 자치능력이 없으니 미국이 주관하여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한국을 당분간 위임 통치하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고 알려진 것이다.

당시 신채호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라고 비판한 것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이승만은 1920년 12월 결국 상해로 왔다. 이때 이동휘는 이승만의 위임통치 문제 때문에 임정이 비난을 받고 있다면서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거부했다. 또 대통령이 상해에 없을 때 행정결재권을 국무총리에게 위임하자는 안에 대해서도 이승만은 거부했다. 결국, 이동휘는 1921년 1월 총리직을 사직하고 임정을 떠났다. 이승만도 그해 5월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임시의정원은 1923년 4월 이승만 탄핵안을 제출하였으나 국민대표대회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탄핵안은 논의되지 못했고, 1924년 9월 임시의정원은 임시대통령이 유고(有故) 상태에 있다고 결정하고, 국무총리 이동녕에게 대통령직을 대리하도록 명했다.

이에 이승만은 크게 반발하여, 하와이 민단장 등에게 임시정부로 보내는 인구세 등 독립자금을 보내지 말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임시의정원은 그해 12월 국무총리직을 물러난 박은식을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로 추대하고, 임정의 새로운 지도체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에 이승만은 임시의정원의 결정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이승만은 “한성정부 약법 제6조에 「본 약법은 정식 국회를 소집 하야 헌법을 반포하기까지 이를 적용함」이라 한 법문(法文)과 위반되는 일을 하여 한성조직의 계통을 보유치 못하게 될 경우 절대 준행치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은 한성정부가 아닌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은 여전히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의 주장이 임시의정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23일 이승만을 탄핵, 면직시키게 된다.

탄핵을 결정하기까지 국민의 대표기관인 임시의정원의 고충과 과정, 그리고 탄핵을 피하려는 이승만 임시대통령의 대응이 마치 90년이 흐른 오늘의 정치상황을 보듯이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정부요인 내에서 합의 형식이라 외부요인에 신경쓸 이유없이 원론적인것으로 탄핵되었습니다.

2. 박그네..

배경은 이야기 안할께요.. 다만 탄핵소추 이전에 촛불집회가 먼저였다는것만 기억하시길.. 
1차 탄핵집회 2016  10월 29일
탄핵소추 2016 12월 3일
당시 박그네 지지율 11월 첫주부터 5프로....

탄핵소추 200명 동의 필요. 가 234  부 56


실패사례

1. 노무현 

탄핵소추시작 2004 3월 12일

대통령이 여러 정치인들의 주도에 따라 탄핵 위기에 처했고, 찬성세력과 반대세력이 난투극을 벌이면서 한국 정치사에 충격적으로 남은 사건이다. 포커싱을 맞춰야 할 지점은 국민들이 '일단은 지켜보겠다'는 스탠스였는데 정치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통령의 탄핵을 강제적으로 주도했다는 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책들이 헌법적으로도 위헌이라고 보기 어려웠음에도 말이다. 때문에 야당은 이후 굉장한 역풍을 맞아야 했고 결과적으로는 기각되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시 정지된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국민 대대적인 탄핵운동이 없었음.
노무현 탄핵에 대한 찬성은 22프로 반대 70프로
https://imnews.imbc.com/replay/2004/nwdesk/article/1960546_30775.html
당시 지지율 30프로대..
결과물은 한나라당의 패착 지지세를 다 빼앗김.. 

위 사례로 보아 현재 석열이 탄핵은 매우 힘들고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입니다. 어찌되었든 30프로의 지지세가 10프로 이하가 되던지 국민이 나서서 뒤집어 엎던지 그런것이 아니면 정치인은 대변해주기 힘들어요..
대변이 안된다가 맞겠죠.. 그를 지지안한다와 탄핵에 찬성한다는 다른 논쟁이거든요.. 자신의 선택을 무른다는건 쉬운일이 아닙니다. 석열이가 어찌되었든 뽑았기에 의원이 자신들의 동의없이 먼저 움직인다면 당근 한나라당(국힘) 꼬라지나는건 필연이에요. 
앞으로 2에서 3년은 더 이꼬라지 봐야 국민이 움직이던지 할거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어쩌겠어요. 뽑은 인간들 손가락 뽑을수도 없는일이고 투표로 인한 대통령을 내가 거부한다고 탄핵되고 바로바로 바꿀수도 없는것을.. 다른이들이 동조하고 움직이지 않는 이상 답이 없으므로 때가 되기를 기다릴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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